【기고문】 내 삶의 모든 것 ! 그것은 탄(炭)이었다. -(사)한국진폐재해재가환자협회 황상덕 회장
작성자관리자
본문
내 삶의 모든 것 ! 그것은 탄(炭)이었다.
(사)한국진폐재해재가환자협회
회장 황 상 덕
내가 살고 있는 태백은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은 길고 눈이 많이 온다. 봄인가 싶으면 여름이고 가을인가 하면 겨울이다. 특히 올해는 겨울이 정말 빨리 온 것 같다. 나는 1975년 12월 경북 울진에서 이곳 태백으로 왔다. 유난히 추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넓은 바다를 보며 생활했던 나에게 이곳 태백은 그야말로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꽉 막힌 아주 답답한 마을이었다. (당시 삼척군 장성읍) 특히, 함태광업소가 자리한 소도는 다닥다닥 붙은 사택과 주변의 루핑집 그리고 누추한 집들은 그야말로 탄광촌 특유의 모습이었다.
이러한 낯선 환경과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현실적 압박감으로 피부로 느끼는 추위는 더욱 매서웠던 것 같다.
70년대 중반 당시는 건강한 몸을 가진 많은 젊은이들이 많이 찾은 곳이 바로 탄광촌이었다. 재산이라곤 건강한 몸이 전부인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다달이 월급이 보장되는 탄광이 어쩌면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직장이었던 것이다. 처음 탄광 생활은 그야말로 힘든 나날이었다. 전문 기술이 없어 아도무끼(후산부)로 입사했다. 석탄을 캐는 맨 앞의 전문 인력 즉, 사끼야마(선산부)의 보조를 담당하는 일이었다. 당시 선산부는 굴안에서의 엄청난 권력을 가진 존재였고 나름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당시 나의 월급은 10만원 정도로 기억하는데 하숙비 제하고 막걸리 한잔하면 수중에 남는 게 별로 없어 저축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왕 굴속에서 탄을 캐는 직업을 선택했는데 그래도 선망의 대상인 선산부가 되어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3년간 성실함과 꾸준함을 보여 1978년 6월에 선산부가 되었다. 흔히 막장이라는 최 일선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여기서 한마디 첨언하고 싶다. 아침드라마에 흔히 등장하는 남녀간의 삼각 또는 사각관계 등을 소위“막장 드라마”라고 이야기 하는데 나는 이렇게 표현하는 언론은 반드시 자기 반성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막장」의 원뜻은 갱도 즉 석탄 또는 광물을 캐는 막다른 곳으로 신성한 노동 현장이다. 제발 더 이상 이러한 표현이 없기를 바란다. 특히 정치인들이 ......
석탄 광부의 삶은 그야말로 힘들었다. 나는 그래도 선산부라는 직책이기에 나름 노동의 댓가를 받았지만 1980년 이전까지는 현금 아닌 쌀로 지급된 적도 있었고 노동자 후생 복지라는 명목으로 자체 목장에서 생산된 우유, 두부 등이 제공되었지만 결국은 그 비용은 광부가 노동력으로 부담했던 것이다. 광부의 임금이 대폭 인상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전두환 정권 때였다. 당시 대통령인 전두환이 1981년 석공 장성광업소를 방문했고 이때 석탄 광부의 현실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어 무려 120%의 대폭적인 월급 인상으로 선산부 250만원, 후산부 200만원이 되었다. 또한 광부의 주거 안정을 위해 정부가 건립비 75%를 지원해 주면서 소위 광부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다. 함태광업소도 1984년경 100세대를 지었으나 종업원 2,000명이 넘어 태부족이었으나, 나는 운 좋게도 선산부라 입주할 수 있었고 현재까지도 그 집에서 살고 있다.
즉, 나는 50여 년 전에 이곳 태백 소도에 자리 잡은 후 아직까지도 살고 있다. 자식이 세 명인데 그동안 잘 키웠고 아니 키운 것이 아니라 애비가 탄광 막장에서 검은 땀을 흘리는 모습을 보며 스스로 잘 자란 것이 아닌가 한다. 자식 자랑은 팔불출이라 하지만 자랑하고 싶다. 큰아들은 세무사로, 둘째는 교육자 그리고 딸은 결혼하여 서울에서 중견 기업에서 당당히 국민의 일원으로 열심히 생활하고 있다. 아들아! 딸아! 고맙고 또 사랑한다.
광산 광부 생활 동안 크고 작은 사고가 많았다. 1982년 1월에 발생한 함태광업소 고목갱 12크로스에서 막장 붕괴로 9명이 돌더미에 깔려 사망하였고 1985년 6월 함태광업소 함백갱에서 가스폭팔로 4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기억에 남는다. 바로 어긋제 함께 막걸리를 마시던 동료였는데 ...... 그 두려움이 있어 나를 힘들게 하였지만 자식 교육(당시 탄광 근로자녀의 학자금은 매우 큰 메리트였음)등 현실이 나를 광부로 남게 하였다. 1993년 6월 30일자로 정부의 공식적인 폐광 통보로 광업소를 타의로 떠났으나 다시 1996년 장성광업소 협력업체에 입사했고 이후 1999년 어룡광업소 태백기업에 후산부로 입사하였다. 재직 중 2002년 10월 당시 가스폭발로 물통이 터져 5명의 생명을 앗아가는 것도 목격했다. 현재로선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비일 비재했다. 기억하고 싶지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탄광 사고는 어쩌면 생산 목표 달성을 위해 광부들을 도구화한 결과일 것이다.
하여간 내 삶의 전부가 석탄(炭)속에서 살아왔고 지금도 광부분들의 당당한 권리 찾기 등 그들의 생활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고자 시민 사회단체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고종 23년 즉, 1906년 6월 29일 대한제국이 제정 공표한 「광업법」(법률 제3호)의 발효로 시작된 120년 석탄산업 역사를 재조명하고 재평가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사)석탄산업전사 추모 및 성역화 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우리나라는 150여일의 많은 각종 기념일이 있음에도 안타깝게 「광부의 날」이 없다. 이에 우리는 3년 전부터 저를 비롯한 많은 분들이 뜻을 같이하여 정부 요로에 광부의 날 제정을 건의하였고 드디어 지난 10월 1일 이철규 지역 국회의원님이 대표 발의한 폐광지역 개발지원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에 6월 29일을 「광부의 날」지정한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감사하고 고맙고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강원특별자치도와 태백시, 삼척시에서 「탄광 자산을 활용한 보존과 개발」이라는 명제를 가지고 탄광 문화를 유네스코에 등재하려고 많은 행정력을 투입하고있다. 석탄이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디딤돌이었고 산림을 푸르게 한 역사적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석탄산업 문화유산은 정부가 직접 정확하고 사실적인 역학조사를 통해 공식적인 통계 자료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 반드시 이것이 전제되고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 경제는 석탄을 먹으며 발전했고 그 석탄은 산업전사를 먹으며 성장했다”라고 어느 경제학자는 석탄산업을 이렇게 압축 표현했다. 석탄 산업전사와 지금도 숨을 헐떡이며 살아가는 진폐 환자를 이제는 정부가 보둠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정부의 당연한 책무인 것이다. 정부의 부작위 즉,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일부러 하지 아니 하는」행태로 이를 외면하지 않기를 기대한다.
대한민국 역사와 함께한 120년 석탄산업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지만 지금 늦었지만 하나하나 한걸음 씩 나가면서 석탄산업을 재평가하는데 정부가 당장 나서야 할 것이다. 특별한 희생에는 특별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는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 되길 기대한다.
태백의 겨울이 시작되었다. 「겨울이 왔으니 봄은 멀지 않으리...... 」라고 어느 시인의 멋진 구절이 생각난다. 다가올 태백의 봄과 함께 석탄산업의 재평가를 위한 사업이 조속히 착수되길 기대해 본다.
2025년 11월 초
기억을 더듬어서......